UCSD에서 방문학생으로 지낸 반년 동안 참 많은 학부생과 대학원생을 만났다. 그들과 섞여 지내며 느낀 미국 공대생들의 생활상과 분위기는 한국과는 꽤나 대조적이었는데, 그중 인상 깊었던 몇 가지를 기록으로 남겨 두려 한다.
1.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도시락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가장 먼저 피부로 와닿은 차이는 의외로 먹는 문제였다. 한국 학생들은 주로 밥을 사 먹는 반면, 미국 학생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도시락 가방을 주렁주렁 들고 다닌다. 처음엔 저 네모난 상자들이 뭔가 싶었는데 전부 집에서 싸 온 도시락이었다. 이건 문화적 차이도 있겠으나 살벌한 밥상머리 물가 때문이다. 한국에선 학생식당에서는 5,000-7,000 원 신촌 거리에서 9,000-13,000 원 안팎이면 꽤 괜찮은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지만, 이곳 학생회관 식당은 2만 원 초반에서 3만 원 중반(15-25불)까지 나간다. 학교 바깥으로 나가면 20-50불은 나온다. 심지어 '신촌 맛잘알'의 입장에서 볼 때 맛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학원생들도 한국처럼 다 같이 외식을 나가기보다는 사무실 한켠에서 전자레인지에 도시락을 데워 먹는 게 일상이다.
2. 칼퇴와 저녁 식사
미국 연구실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대단히 의아했던 점 중 하나는 학생들이 퇴근을 정말 일찍 한다는 것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이름만 대면 아는 대가급 교수의 연구실인 데다 학생들 개개인의 링크드인이나 CV를 보면 각국에서 엘리트 코스만 밟아온 친구들인데, 왜 연구에 더 시간을 쏟지 않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한국에서 인턴을 하고 지금 대학원생으로 생활하는 곳은 밤 10시, 12시까지 불이 켜져 있는 게 예사고 주말 출근도 흔한 일이었기에 이들의 빠른 퇴근은 다소 낯설게 다가왔다.
이게 내가 머물던 연구실만의 특징인가 싶어 주변 다른 랩 학생들에게도 물어봤지만, 전체적으로 연구실 체류 시간 자체가 한국보다 짧았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저녁 무렵 ECE 건물 외벽을 슥 둘러보면, 연구실 불이 꺼진 비율이 한국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높다. 단순히 사생활을 중시하는 문화 때문도 있겠지만, 여기에도 외식 물가의 영향이 큰 듯했다. 한국처럼 저녁을 밖에서 사 먹고 다시 연구실로 돌아오는 생활을 하려면, 한 끼에 3만 원씩 한 달 20일만 잡아도 식비로만 60만 원이 더 깨진다. 학생 입장에선 감당하기 힘든 지출이다.
결국 다들 저녁 식사를 집에서 해결하기 위해 일찍 퇴근하는 것이었고, 연구실을 나선 이후의 시간은 집에서 재택으로 업무를 이어가는 듯했다. 저녁을 먹으면서 동시에 다음 날 점심으로 가져갈 도시락까지 직접 싸야 하니, 이들에게는 일찍 귀가해 부엌에 서는 것까지가 하루 일과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셈이었다.
3. 질문왕
수업 시간에 느낀 질문 문화의 차이도 꽤나 신선했다. 연세대에서 30~40명 규모의 수업을 들으면 2~4명, 100명쯤 되는 대형 강의에선 오히려 한두 명만 입을 열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은 사람이 많아질수록 질문이 사라지는데, 여기서는 100명 수업에 10~20명씩 손을 드는 게 예사였다.
질문의 수준이 모두 높아야 한다는 강박도 없어 보였다. 방금 설명한 내용을 놓쳤으니 다시 알려달라는 기초적인 요청부터, 대학원생들의 경우 특정 원리를 설계나 연구에 이렇게 적용하는 게 맞느냐는 심도 있는 논의까지 그 변주가 굉장히 넓었다. 한 번은 전력 수업 중에 교수가 스타트업 경험의 장점을 툭 던졌는데, 인턴 경험이 있던 학생이 갑자기 손을 들더니 교수님 말씀에 동의한다며 자기가 현장에서 배우고 느낀 점을 적극적으로 공유하며 대화를 이어가는 장면도 봤다. 수업과 관련 있는 전력 스타트업 이야기라지만, 학생이 그렇게 주도적으로 흐름을 가져가는 게 참 인상적이었다.
한국에서는 교수님들이 어떻게든 학생들의 입을 열려고 질문에 참여 점수나 추가 점수를 걸고는 하지만, 여기서는 상황이 정반대다. 오죽 질문하려는 사람이 많으면 교수님이 수업 진도를 위해 특정 질문은 나중에 다룰 거라며 넘기거나, 개인적인 이야기는 오피스 아워(OH)로 오라고 선을 그을 정도였다.
이런 소통의 풍토가 부러우면서도 우리 현실을 돌아보게 됐다. 한국은 질문을 주도하는 5% 미만의 '머리층'만 있고, 가끔이라도 입을 여는 '허리층'이 전멸하다시피 한 구조다. 반면 미국은 이 허리층이 아주 두껍고, 아예 말을 안 하는 사람들은 30%도 채 안 되어 보였다. 사실 질문 안 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적극적인 사람으로 변하는 건 어렵다. 그래도 우리 개개인이 조금씩이라도 노력해서 질문하는 습관을 들여본다면, 한국 대학의 강의실 풍경도 조금은 더 생기 있게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싶다.
4. 인턴십과 선순환: 현장의 언어로 전공 공부하기
사실 내가 생각하기에 전기전자공학의 코스웍은 전 세계 어디를 가든 거의 표준화되어 있다. 20~30년 이상 된 정통 분야들은 그 뿌리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MIT를 가든 연세대에서 공부하든, 결국 똑같은 Pozar의 책을 펴놓고 전송선로 이론(Transmission line theory)이나 스미스 차트, 임피던스 매칭을 공부한다. 물론 학교마다 깊이나 실습 유무의 차이는 있겠지만, 배우는 뼈대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학부 졸업 시점에서 미국의 상위권 학생들이 한국의 상위권 학생들보다 역량적으로 앞서 나가는 걸까. 나는 그 결정적인 차이가 바로 '인턴십'에서 온다고 본다. 미국 학생들은 저학년 때부터 기업 인턴의 문을 끊임없이 두드린다. 여름 방학이 3개월로 길다 보니, 2학년 때부터 매년 인턴을 하면 졸업 전까지 최소 9개월의 실무 경험을 쌓게 된다. 처음에는 스타트업이나 연구소에서 시작해 고학년이 되면 퀄컴(Qualcomm), 애플(Apple), 스페이스X(SpaceX), 혹은 세계 최고의 RF 계측장비 회사인 키사이트(Keysight) 같은 곳에서 기회를 얻기도 한다.
단순히 9개월이라는 경력보다 무서운 건 '관점의 변화'다. 인턴을 준비하며 기업의 직무 설명서(JD, Job Description)를 뜯어보다 보면, 산업계가 요구하는 지식과 스킬셋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예를 들어 전자기학이나 안테나 분야 공고에서 HFSS 활용 능력을 요구한다면, 학교로 돌아와 최대한 HFSS를 다루는 프로젝트 수업을 골라 듣는 식이다. 인턴 현장에서 마주친 선배 엔지니어들을 보며 고급 전자기학이나 통신 회로 설계 같은 심화 지식, 혹은 CST, VNA 같은 하드웨어 툴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이를 학교 공부와 연결한다. 이러한 선순환이 반복되면서 졸업할 때쯤엔 준비된 엔지니어가 되어 있는 것이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블로그에 적는 이유는 단순히 미국이 부럽다거나 잘났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 학생들도 이런 태도를 충분히 흡수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국이 인턴 자리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건 사실이지만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삼성의 방학/학기 인턴도 있고, ETRI에서도 제공한다. 설령 인턴에 떨어진다 해도, 업계가 요구하는 스킬셋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에 맞춰 스스로를 단련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미래를 이끌어갈 똑똑한 후배들을 보며 참 안타까울 때가 많다. 다들 너무 '범용적인 준비'에만 매몰되어 있다. 적당히 학점 챙기고 학교 시험 공부만 하다가, 정작 기술 연마는 4학년이 되어서야 부랴부랴 시작한다. 가진 역량은 충분한데 공학과 기술에 100% 몰입하지 못하고 방학을 무미건조하게 보내는 게 못내 아쉽다. 조금 더 일찍 현장의 언어를 이해하고, 자신만의 날카로운 기술적 무기를 갈고닦는 몰입의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Note. 조언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직접 해보니 정말 좋아서 건네는 조언이고, 다른 하나는 해보지 못해 뒤늦게 남는 아쉬움에서 우러나오는 조언이다.
'미래의 직무기술서'를 미리 읽어보라는 것은 전자의 조언이다. (대학원의 경우 각 연구실 홈페이지의 미래 지원자 인재상/요구가 직무기술서에 해당한다.) 나 역시 미래의 요구사항에 기초해 현재의 목표를 정립하는 연습을 해왔는데, 이것이 습관이 된 후로는 공부와 연구의 방향을 잡는 데 정말 큰 도움을 받았다. 실제로 한국과 미국에서 각각 한 번씩 경험한 대학원 인턴십은 내게 무척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반면, 저학년 때부터 기업 인턴을 알아보고 도전해 보라는 건 내가 하지 못해 남는 후자의 아쉬움이 섞인 조언이다. 나는 3학년이 되어서야 소위 말하는 '의식적인 노력'을 시작했기에 기회는 4학년 때뿐이었는데, 당시에는 대학원 인턴을 하느라 심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만약 대학 생활을 다시 할 수 있다면, 나는 2학년 이전의 저학년 때부터 부딪히며 기업 인턴을 적어도 한 번 이상 경험했을 것이다.
[1] https://www.flaticon.com/kr/free-icon/usa_2875212?term=%EB%AF%B8%EA%B5%AD&related_id=2875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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